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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러일전쟁 D-6개월 고종, 러시아에 밀서를 보내다편 내용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일본의 기습공격



1904년(고종41년) 2월 8일, 뤼순 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군함이 일본군함의 기습공격으로 격침된다. 하루 뒤, 인천 앞바다에 있던 러시아 군함도 일본군함의 공격을 받는다. 선전포고 없이 잇달아 진행된 일본군의 공격은 러일전쟁의 신호탄이었다. 


고종의 밀서

일본군이 러시아를 공격하기 6개월 전, 고종은 러시아 황제에게 밀서를 보낸다. 러시아의 승리를 확신한 고종의 밀서내용이다.


러시아의 승리를 확신한 건 고종뿐만이 아니었다. 전 세계가 러시아의 압승을 예상했다. 영국에서는 러시아가 일본을 며칠 만에 이기냐를 두고 내기 도박판이 벌어졌을 정도... 실제로 전력 면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격차는 컸다. 러시아 육군은 일본 육군보다 5배 이상 많았고, 해군 전력도 발틱함대를 보유한 러시아가 더 유리한 상황이었다. 


서양 열강이 러시아의 승리를 예상한 건 러·일 간 전력 차이뿐만이 아니었고 전쟁이 발발하던 20세기는 인종주의적 시각이 만연하던 시기라 동양국가를 야만국으로 보던 서양 국가들은 문명국인 러시아가 당연히 승리할 것이라 예상했다. 즉 러일전쟁을 우월한백인종과 열등한 황인종의 싸움으로 보았다.

한편으로는 황화론(독일황제 빌헬름2세가 주장한 것으로 황인종이 유럽문명에 위험이 된다는 논리)과 13세기 유라시아 대륙의 패권을 장악한 몽골제국은 러시아 조치울루스지역도 장기간 지배를 하다보니 황인종(몽골족)에 대한 콤플렉스가 존재했습니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

청일전쟁 승리로 얻은 요동반도를 러시아가 주도하고 프랑스 독일 삼국의 간섭으로 반환을 하게되자 일본군 40여명이 자살을 하고 와신상담을 합니다.

※ 와신상담 
불편한 장작위에 몸을 눕히고 쓸개를 맛본다는 뜻으로 원수를 갚기 위하여 온갖 괴로움을 참는 상황

청일전쟁 배상금으로 군비확충에 투입을 하면서 10년간 복수를 계획합니다. 심지어 학생들에게 까지 왜곡된 복수심을 심어주기도 합니다. 

일본의 승리 요인


청일전쟁 전보다 예산을 9배 더 늘려 편성한 일본은 전쟁자금을 지원해줄 나라가 필요했다. 그러나 모두가 러시아의 승리를 예상해 자금을 지원해 주지 않던 상황. 이토 히로부미는 전쟁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 미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자금을 받는데 성공한다. 러시아의 승리가 당연시 되던 상황에서 미국이 일본에게 전쟁자금을 지원해준 이유는 일본이 승리시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미국자본참여를 염두해놓은 것, 미국 유대인 은행가 야곱 시프가 러시아의 유대인박해에 대한 반발로 원조를 해주었다. 미국뿐만 아니라,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4년전 청에서 의화단 운동(1900년 청에서 일어난 외세배척운동)이 일어나는데 러시아군은 자국민 보호 명복아래 청에 주둔하고 만주를 점령하자 러시아 남하에 위기를 느낀 영국은 일본을 이용해 러시아를 견제하려 했다. 이에 일본은 제1차 영일동맹을 결성한다. 이 영일동맹은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영국 미국의 힘을 얻은 일본과 1890년부터 동맹관계였던 프랑스와 러시아 그리고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한 독일도 러시아가 반대쪽으로 눈을 돌리길 원했기에 3나라가 동맹을 맺고 대립을 한다.



대한제국 홀로서기 중립선언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은 조선내 러시아 영향력이 커지자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자주적인 광무개혁을 실시한다. 

※ 광무개혁특징
  • 외세 의존적 자세 탈피
  • 황제 중심 개혁
※ 갑오개혁 을미개혁과의 차이점
  • 황제 직속 군통수기관 원수부 설치
  • 무관학교설치
  • 무기수입

러일전쟁 d-19  전운이 감돌자 고종은 대한제국의 중립을 선언한다. 그러나 고종의 중립선언은 묵살되고,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그의 개혁은 수포로 돌아간다. 오히려 한달 후 한일의정서를 체결한다


한일의정서의 영향으로 제물포 군사 기지화를 하고 대한제국 3000명 예속화 하는 등 을사늑약의 전초전이 되었다.

러일전쟁 전투과정

뤼순해전 서해해전 울산해전에서 승리한 일본은 육균진격을 한다. 뤼순항을 점령한 일본의 군사는 군사영웅이 된다.


뤼순 전투 후 고종은 러시아황제에게 밀서를 보내는 등 일본의 승전소식에 불안함을 느낀다. 이후 봉천전투 등 일본이 승리를 계속한다. 자만에 빠진 러시아가 세계최강의 발틱함대를 파견하지만 수에즈운하로 가려했지만 일본의 동맹군인 영국의 반대로 빙 둘러가는 바람에 7개월이나 걸리게 된다


일본이 전쟁에는 이겼지만 힘이 빠져 미국에 중재를 요청하여 러시아와 일본은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한다. 여기는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감독권을 인정하는 조항이 담긴다. 터무니없는 강화조약의 중재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대통령으로 한반도에서 일본의 우위권을 인정한 이 강화조약을 중재한 공로로 루스벨트는 ‘노벨평화상’까지 받게된다. 평화란 강대국의 평화이고 노벨평화상은 강대국의 논리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즉 러일전쟁은 한반도와 만주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벌인 제국주의 전쟁이다.

  • 러일전쟁의 경과를 보며 세계정세에 대한 시야를 더 넓혀야하고 망국의 경험을 유사한 상황시 혜쳐나갈 수 있는 지침이 될 수 있어야 한다. 
  • 한국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을 이분법적으로 해석(일본의 침략 -일본의 식민지화 -한국의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시선으로 보아야 한다.
  • 러일전쟁의 역사적 사건의 결과를 두고 세계열강들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역사적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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