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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방송하는 장수 프로그램이 되길 기대하는 알쓸신잡, 어쩌다 보니 첫 글을 시즌2 해남,강진부터 시작합니다. 다시 내용을 되새기고 싶어 글로 남기려 합니다. 윤홍준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도 첫 번째로 다루던 장소가 해남,강진인데 왜 일까 서로 의견을 나누다 직접 통화까지 하는 에피소드, 결국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다 맞았는데 그 내용은 항상 서울중심, 도시중심으로 국토를 보는 습관에서 벗어나길 원해서 땅끝으로 가자라는 생각 그리고 좀더 의미있게 가자라는 마음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을 해서 학생들을 데리고 방문을 했는데 영호남갈등을 극복하고 국민들이 우리국토의 아름다움을 같이 공유하자는 마음으로 경북에 위치한 영남대 학생을 데리고 남도를 답사하는 컨셉으로 진행을 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계기만 있으면 감상적 상념을 일으킨다.

봄비가 내리고 낙엽이 떨어져도 여린 상처를 받는게 인간의 감정인데 하물며 '땅 끝'에 서서 아무런 감정이 없을 것인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남도 답사 일번지 중


해남통닭


점심은 통닭집으로 갔습니다. 우리가 아는 통닭이 아니고 닭 코스요리를 통닭이라고 합니다. 해남에서 백일넘게 키운 통종닭으로 부위별로 맛의 특징을 살려 요리 한 음식으로 첫 번째요리는 닭발과 날개구이 입니다. 두 번째는 닭모래집과 가슴살을 얇게 저며 만든 닭 육회입니다. 정말 신선해야만 가능한 요리일 듯 합니다. 도저히 맛이 상상이 되지 않네요. 세번째요리는 매콤달콤 주물럭, 네번째는 백숙과 닭죽 이렇게 닭 한마리로 푸짐한 한상차림이 됩니다. (전남 해남군 연동리 456-2 진솔통닭 토종닭 55000원)



남도 한정식


저녁 만찬은 남도 한정식으로 남도음식 하면 빠지지 않는 다양한 해산물요리와 홍어삼합 등 갖가지 음식으로 가득찬 한정식을 드셨습니다. 이 음식을 보며 우리나라와 서양의 음식문화와 구글과 네이버의 연관성을 얘기하시는데 비유가 정말 꿀떡입니다. 내 마음대로 골라서 먹는 우리문화는 네이버와 같고 ,주는 순서대로 먹는 서양식문화는 구글과 같다라는 얘기입니다. 


하멜기념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 선박 선원이었던 헨드릭하멜이 1653~1666년 조선에 표류하였다가 1668년 네덜라드로 돌아가기까지의여정을 기록한 책이 하멜표류기입니다. 네덜란드동인도회사는 동양무역을 위해 설립한 회사로 18세기 후반까지 해상무역과 식민지 경영을 전담하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 자기문화가 유행을 하면서 일본과의 교류를 하였는데 나가사키를 가던 도중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류를 하게 됩니다. 탈출을 하려했지만 실패를 하고 인조5년 제주도에 표류했다가 조선에 최초로 귀화한 서양인인 박연이 이들을 만나러 왔지만 네덜란드어를 잊어버려 겨우 얻은 정보가 나가사키로 가는 중이였다는 내용이였습니다. 그들은 서울로 올라와 효종을 알현하게 되는데 그 들이 운반중이던 서양문물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그들을 통해 서양의 기술을 얻려 했지만 그들은 청나라 사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하자  그 당시 북벌을 추진하던 상황에서 서양인이 있다는 것을 들키면 안되어서 그들을 유배를 보내는데 그 곳이 강진입니다. 그 당시 기근이 찾아와 엄청나게 힘이 들었는데 드들을 도왔던건 백성들과 스님들이였다고 합니다. 결국 드들은 일본으로 탈출을 했지만 그 곳에서도 1년간 조사를 받은 후 고향으로 가게 되었는데그 들에게 남은 임금문제로 인해 임금을 받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가 하멜표류기입니다. 하지만 돈을 많이 받기 위해 고생을 많이 했다고 써야 했기에 과장이 많이 들어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습니다.



윤선도유적지와 녹우당

윤선도는 정철과 더불어 조선시가의 대가로 대표작은 <어부사시사>가 있습니다.이 곳에는 윤선도의 놀이터였던 세연정이 있는데 전면이 모두 열리며 360도 전체를 볼 수있고 정자 안까지 햇볕도 내리쬡니다. 조선최대의 욜로생활을 하신 분입니다. 하지만 관료생활을 잘 하지못했는데 1차유배는 광해군때 벼슬을 했지만 1616년 성균관유생으로 이이첨일파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함경도 경원에 유배를 가게 됩니다. 이 후 1623년 서인일파가 정변을 일크텨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를 왕위에 앉힌 인조반정이 일어나는데 윤선도는 인조아들인 봉림대군의 사부였기에 다시 돌아와서 효종때는 귀양살이를 면합니다. 하지만 또 영덕으로 2차 귀양을 가게 되는데 왕이 남한산성에 갇혀 있어 송파나루로 가는데 그 사이 삼전도 사건이 일어나고 왕은 궁궐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때 알현도 안하고 갔다는 이유와 삼전도 굴욕에 모든 것이 허탈해진 윤선도는 보길도에 정착해서 십여년을 사는데 그 곳에는 집이 25채로 타운수준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 남아있는것은 세연정 뿐입니다. 그 당시 놀면서 지은 시가 어부사시사로 어부의 사계절을 노래한 시입니다.(1651년 총40수의 연시조) 이 시는 한글시가로 그 당시는 한자를 써야 인정을 받던 시대인데 윤선도눈 우리말로 표현을 하여 우리말 문학의 격조를 높였습니다.



윤선도 선생이 있었던 집을 녹우당이라고 하는데 효종이 윤선도에게 선물한 수원의 집을 분해하여 뜯어와 해남에서 다시 조립해 지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부자였다고 합니다.이곳에는 오백년된 비자나무 숲이 있다고 합니다. 이 녹우당 옆에 유물 전시관이 있는데 윤선도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의 유물도 전시가 돼어 있다고 합니다. 윤듀소 손생의 재산상속과 분배에 관한 문서인 분재기가 있는데 그 문서가 어마어마하다고 합니다.



다산초당


차나무로 둘러쌓인 강진군 만덕산 그 가운데 숨어있는 조용한 집 한 채가 정약용 선생님이 유배를 와서 계셨던 곳입니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후기 실학자로 배다리를 준공하고 수원화성을 설계한 기술자로 강진 유배당시 500여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그 대표작은 '목민심서'입니다. 정약용 선생은 과학기술,공학,국방,행정,법,의학에 이르는 모든 분야에 다 최고의 수준이셨던 한국의 다빈치 같은 분이십니다. 서양의 문물이 앞서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걸 계기로 서학(천주교)에 관심을 두었는데 유교와 반대되는 점이 많아서 조선사회에서 탄압을 받았고 서학을 공부했다는 이유료 강진으로 유배를 오게 되셨습니다. 다산초당은 원래 고산 윤선도 집안이자 정약용의 외가인 해남 윤씨 집안의 별장이었던 산정이였는데 차나무로 가득한 이 곳이 아늑하고 조용하며 경치가 아름다웠고, 가까이 백련사에 절친 혜장이 있어 이 곳에 머무르고 싶어 시를지어 마음을 전하여 이 곳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10년동안 18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500권의 책을 저술했습니다. 다산초당에서 조금 떨어진 '다산동암'에는 저술에 필요한 2000원의 책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주요저서는 '일표이서'라 불리는 세 권의 책인데 일표는 경세유표,이서는 목민심서와 흠흠신서입니다. 경세유표는 행정기구의 개편,관제,토지제도 부세 제도 등  중앙정치의 혁신에 관한 내용이고, 목민심서는 목민관, 즉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저서로 관의 처지가 아닌 민의 입장에서 저술한 것이 특징입니다.

서문 

요즈음 사목이란 자들은 이익을 추구하는 데만 급급하고

어떻게 목민해야 할 것인가를 모르고 있다.


이때문에 백성들은 곤궁하고 병들어 줄을 지어 진구렁에 떨어져 죽는데도 

사목된 자들은 바야흐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에 자기만 살찌고 있으니

어찌 슬픈일이 아니겠는가

                 -[목민심서] 중

서문 이후 정약용은 목민관들이 지켜야 할 지침들을 12편 72조에 나누어 열거하였는데 다음은 그 중 일부입니다.

재해와 액운이 있으면 불탄 것을 구하고 빠진 것을 건져내기를 

마치 내가 불에타고 물에 빠진 듯 서둘러야지 늦추어서는 안된다.


술을 금하고 여색을 멀리하며,노래와 춤을 물리치며

감히 유흥에 빠져 거칠고 방탕해져서는 안 된다.


상을 당한 사람에게는 부역을 감해주는 것이 옛날 도이다.

스스로 전결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감해주는 것이 좋다.


기근이 드는 해에는 반드시 전염병이 있게 되니

그 치료법과 시체를 거두어 묻는 일에 더욱 마음을 써야 한다

                                          -[목민심서] 중

일표이서 중 마지막 책이 '흠흠신서'인데 이는 형법서로써, 형벌규정의 기본원리와 지도이념이 요약되어 있고 중국과 조선의 판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유배가인자가 쓴 책이였으므로 이 훌륭한 책들과 인재를 국가에서는 쓰지도 못하고 영향을 미치지도 못했습니다. 이 것이 조선의 비극이자 정약용선생의 비극인 것입니다. 


'거중기'는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데 사용하던 기계로 다산 정약용이 고안을 한 것입니다. 정조가 수원성을 축조할 때 이 거중기를 이용했기에 수원화성의 돌을 쉽게 쌓아 올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정소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화성으로 이장(융릉)한 후 행차할때 한강을 건너야 하는데 행렬이 가기가 힘든 문제를 다산 정약용선생이 '배다리'를 만들어 해결하였습니다. 배다리란 배를 늘어놓고 그 위에 판자를 덮어 만든 다리로 왕이 말을 탄 채로 한강으르 통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조의 수원화성 행차모습을 담은 의궤가 남겨져 있는데 '원행을묘정리의궤'라 합니다. 엄청난 수의 수행원들 뒤로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가마가 나타나고 바로 그 뒤에 나타나는 왕의 말과 수행원들은 약 6000명,1400필의 말이 움직였던 초대형 행렬이었습니다. 이는 조선 최고의 이벤트이자 잔치였는데 이때 실제로 백성들에게 음식도 나눠주기도 해서 국정지지도 상승하기도 했습니다. 11년을 정조와 함께하였는데 정조 승하 후 순조가 즉위 2년차 강진으로 유배가 되게 됩니다.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아들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쓴 편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한때의 재해를 당했다고 하여 청운의 뜻을 꺽어서는 안된다. 사나이의 가슴 속에는 항상 가을매가 하늘로 치솟아 오를 기상을 품고 천지를 조그마하게 보고 우주도 가볍게 손으로 요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녀야 옳다.

조선을 새롭게 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계속 사람들과 교류를 하는데 초의선사, 추사김정희선생 등 조선정부가 버린 지식인들과 끊임없이 교류를 했습니다. 


고려청자박물관

박물관 뒷 편에는 청자빚기 체험장도 있습니다.



이 청자의 용도가 무엇인가에 대서 추측을 하셨는데 매병이라 부르는 술을 담는 그릇이라고 합니다. 청자생산의 요건은 첫째,흙이 좋아야 히고 둘째, 나무가 많아야 하는데 강진은 흑과 숲을 모두 갖춘 곳이라 이 곳에서 발달을 했다고 합니다. 서양에서는 도자기를 만드려고 했지만 무슨 흙을 사용했는지 알지 못해 실패를 하고 수입을 했는데 도자기에 그려진 그림으로 인해 문화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고 합니다. 유럽 정원의 모습이 바뀌게 되고 정자도 생겨나고 침대마저 정자스타일이 등장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유럽인의 라이프스타일까지 바꾼 도자기는 중국이 독점하여 수출을 했는데 명나라 경덕진에서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어느 날 이 곳에서 민란이 일어나 도자기 생산이 멈추게 되어 대체 수입로를 찾았는데 그 곳이 일본이였습니다. 일본이 수출하면서 도자기 포장을 하는데 그 포장지에 그려진 일본 민화들은 고흐,마네,모네 등에게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사실 일본은 우리나라의 도공을 임진왜란때 잡아가서 한거고 우리나라는 고려때 부터 강진요,이천요 등 도자기 문화가 발달을 했었는데 아쉽습니다.




송호해수욕장

소나무가 너무 이뻐 보였던 송호해수욕장, 현준씨도 기대하지 않은 발견이라고 무척 좋아하시던 모습.. 정말 가면 힐링느낌이 들 것만 같은 장소였습니다.


땅끝마을과 땅끝전망대

땅끝마을은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한반도의 최남단 마을입니다. 왜 이 마을로 사람들이 모이는가? 세계 최북단 마을 노르웨이의 롱위에아르뷔엔, 남미 최남단 아르헨티나의 우수아이아, 유라시아대륙 최서단 포르투칼의 호카곶 등 대륙과 바다의 경계가 되는 곳처럼 인간은 자연에 마디를 만들고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를 나눕니다.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 보는 것 그것이 여행의 참 맛이고 다르게 보려고 노력하듯 다른 이의 삶도 이해해보자는 말이 와닿습니다. 결국 풍경을 완성하는 건 사람인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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