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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희열2 호사카 유지



2019년 4월 6일 방송

MC - 유희열
패널 - 김중혁, 다니엘, 신지혜




호사카 유지?

세종대 독도종합연구소장으로 일본인이지만 한국인으로 귀화하셨습니다. 

※ 귀화라는 단어가 일본에서는 일왕의 신하가 된다 라는 의미라서 쓰지 않고 국적을 바꿨다라고 말씀을 하신다고 합니다. 

개명하지 않은 이유?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는 것을 계속 증명하는데 있어 일본인이 주장하는 것이 훨씬 무게감이 실리지 않을까 하는 주변의 의견으로 개명하지 않았고 본인의 소명을 다했을 때 개명할 생각이라고 합니다. 


왜 독도를 연구할까? 



한 학생이 독도가 한국땅입닊? 일본땅입닊?를 물었는데 그 당시 관심이 없어 알지 못해서 그 답을 찾기 위해 무려 21년간 독도를 연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독도 연구 21년

원래 4년의 연구 끝에 한국땅이라고 잠정적 결론을 내렸습니다. 


1877년 제작된 대일본전도에 독도가 지도에 없고,


일본 중앙정부 공식문서인 태정관 지령문에 울릉도, 독도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라는 글이 적혀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왜 일본인 이름을 쓰지말라는 등 악플도 많아 처음에는 상처를 받았지만 정면돌파하자라는 생각으로 일본어로된 홈페이지를 개설해서 독도가 한국땅임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본인은 학자이기에 객관적인 진실을 규명하고자 하는 일이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한국인이 되기까지? 


한국을 처음 만난 건 일본에서 유명한 스포츠 선수 중 장훈, 역도산 등 재일교포가 많았는데 그들이 본인에게 영웅이였고 한국인들은 뭔가 다르다고 느꼇다고 합니다. 이 후 고등학교때 라디오로 한국어를 배웠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권유로 도쿄대 공대를 들어갔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역사, 철학을 많이 공부했다고 해요. 우연히 대한항공으로 미국을 다녀오다가 경유 대기시간동안 김포국제공항에서 관광객을 모집해서 관광을 하게되었는데 그때 가이드분께서 일본이 경제대국이 된 이유는 한국전쟁 때문에 한국인의 피로 이룬 부흥이라는 말을 당당히 하는데 이때 한국 사람은 굉장히 강하고 대단하다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일본의 문화는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본심과 겉표현이 다른 이중성이 일본 특유의 가치관인데 이는 사무라이 문화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무라이는 모든 정보를 말하면 적에게 들키게 되는 것이므로 마지막 부분은 감추는 것이고 본인은 솔직하게 말하는 한국 문화에 오히려 매료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후 일본에서는 잘 가르치지 않는 침략의 역사를 알고 싶어서 한국 유학을 결심하게 됩니다. 우연히 잡지에서 을미사변을 접했는데 1895 8월 20일 일본의 자객이 명성황후를 살해한 사건을 알게되면서 한국인이 일본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으로 국적을 바꾸고 지금의 활동을 하는데 아버지가 하신 말이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위안부 정확하게는 성노예로서 '위안부'라는 용어는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종군 위안부'에서 비롯된 용어로 일본군 '위안부'로 쓰기로 한것입니다.


문제는 일본은 강제성이 없고 증거가 없다는 발언입니다. 그래서 유지씨는 그 증거를 찾아내려고 문서위주의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위안부 강제동원 증거들




그리고 아카이브 검색을 통해 신분을 속여 위안부를 모집한 문서를 수집하였다고 합니다. 


그 문서에는 1937년 난징대학살 이 후 위안소가 급증을 하는데 이는 난징대학살 당시 현지 여성을 성폭행하고 살해를 하자 위안소를 만들지 않으면 더 큰일이 날것이다라는 이유로 만든다는 논리입니다. 


이 당시 발견된 일본군의 비밀 명령 문서에는 업자를 선정한 건 일본 정부와 일본군으로 업자가 자발적 희망에 의한 것으로 하여 일을 진행할 것이라는 말도 다 적혀있습니다. 


이는 성노예상태를 증명하는 문서들입니다. 연구를 할수록 할머니들의 증언이 사실임이 확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문서들을 최초로 발견했다는 것도 놀라기도 했지만 좀더 빨리 한국에 알렸어야 한국사람들도 좀더 빨리 알았더라면 위안부 문제는 일본의 전쟁범죄라는 것을 당연히 인식했을 것인데 안타까워 했습니다. 


태국에서 나온 간호조무사라는 명단도 아마도 위안부일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이렇듯 신분이 위장된 채 동남아까지 동원이 됐다는 것입니다. 


요미우리 기자가 24세 조선 여성을 만났사례가 있는데 일본말을 잘해서 왜 잘하냐고 묻자 본인은 교사였고 도쿄공장에서 연수를 한다기에 왔는데 미얀마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한일 '위안부' 합의



당시 일본에게 1억엔과 화해,치우재단을 설립하고 합의를 했으나 공식사죄와 법적배상이 빠져잇습니다. 



왜 일본은 사과하지 않는가



나치는 망했지만 일왕 중심으로 청산되지 않은 제국주의 세력이 있고 아베 할아버지 역시 A급 전범 혐의자였으나 석방이 되었고 이 후 백인의 지배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킨 해방전쟁이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잔신의 인생을 미화시켜야 하기에 패배를 할바엔 할복을 하는 것입니다. 미학에 대한 집착이 역사왜곡과 은폐로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21세기 신친일파



해방후에도 그들의 잔재는 청산되지 않고 아직도 부정한 영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신친일파들은 일본에게 1년 1억에 해당하는 돈을 받고 일본 우익의 주장을 여론화 하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미국 로비 시장에서도 일본 로비 자금이 있는데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에 대한 오해와 진실





혐한시위도 있지만 극히 일부 사람들이고 요즘에는 자발적인 반혐한 카운터 시위가 있다고 합니다. 정치적 이유로 극단적인 모습이 부각되긴 하지만 한국에서는 건강한 세력들이  많이 조명되어 양국의 시민이 저로 손을 잡길 바란다는 말씀이 정말 와닿았습니다. 


심지어 일본에서 안중근의사를 추모하고 행사도 있는데 여순감옥 투옥 당시 그를 감시하던 일본인 외교관이 그 가문에서 긴 세월을 추모행사를 해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저항 시인인 윤동주의 기일에는 그의 시를 낭독하고 아리랑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재조명하고 싶은 독립운동가 조명하 의사



조명하의사는 대만에서 어떠한 조직도 없이 개인으로 거사를 진행했는데 항일운동 전 일본 오사카로 가서 들은 정보가 대만에 일본 왕족이 많이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 왕족을 표적으로 최초로 의거를 일으킨 분이라고 합니다. 1928년 일본 육군대장이자 히로히토 일왕의 장인이 대만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암살 계획을 수립하고 환영 인파속에서 교통신호에 차량이 멈추자 거사를 진행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왕족을 노리는 거사의 계보가 시작이 되었는데 이봉창, 윤봉길로 이어지고 윤봉길 의거에 감동한 중국 장제스는 임시정부를 전폭 지원을 하게되고 카이로회담에서도 국제회의에서 대한민국 독립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독립운동들이 우리 민족의 독립에 큰 기여를 한 것입니다. 


 

잊지말아야할 독립운동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후 일제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의사의 어머니로 죽음을 앞둔 아들에게 항소하지 말라는 편지를 전했다고 합니다. 


이 후 남은 두아이들과 연해주로 망명을 하고 그 곳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하며 블라디보스톡, 상하이, 바이칼호수 등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하며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소홀했지만 피우진씨가 국가보훈처장에 되면서 많이 발굴에 힘쓸것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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