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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잡3 서부산투어 임시수도기념관


북한의 공격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순식간에 한반도 전역이 전쟁터가 되자 국민들은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이동을 합니다. 그 종착지가 부산항으로 이승만정부도 부산에 임시수도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대통령 관저로 사용한 곳이 헌 임시수도 기념관이로 사용중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환도한 이후 경남도지사 관사로 사용되다가 1983년 7월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이전하면서 부산시가 이 건물을 인수했다. 부산시는 1984년 6월 이 건축물의 역사적 가치를 살리기 위해 피란수도 유물을 전시하는 임시수도기념관으로 개관했다. 2002년 5월부터는 부산시 지정 기념물 53호로 지정해 관리되고 있습니다.




임시수도기념관
  • 매일 09:00 - 18:00 1월 1일 휴관 월요일 휴무
  • 관람료 : 무료

부산 서구 임시수도기념로 45 임시수도기념관

051-244-6345




임시수도기념관은 그당시 대통령관저로 부민동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오르면 계단이 보입니다. 그 곳에 원래있던 건물을 활용하여 만든 곳으로 원래 일제강점기 경남도지사 관사(1926년)로 준공되었던 건물입니다. 



김일성은 당시 공산주의 진영 지도자들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에게 금방 이길 수 있다고 설득을 해서 소련에서 무기지원을 해주고 비밀리에 중국군대가 많이 개입을 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압도적인 전력차이를 보이며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군내에 병력이동 정황이 보고된기도 했으나 묵살이 되고 그렇게 3일만에 북한군은 서울 앞까지 진출을 합니다. 


북한이 보유한 탱크는 소련이 만든 것으로 투박하고 마감도 잘 되지 않아 3~4개월이면 고장이 나는데 공산주의 전략은 물량전으로 저렴하게 전차를 대량생산을 합니다. 독일은 2타대전 중 8500대를 생산하는데 비해 소련은 8만대를 생산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국군은 전차는 한대도 없었는데 한국전쟁 중 미군과 북한의 최초 교전인 '오산전투'에서 보명부대만 보내고 박살나고 합니다. 


이때 서울이 다 점령되기도 전에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헤 한강다리를 폭파해버려 90만명에 달하는 서울시민 대부분은 피란을 가지 못하게 됩니다. 


북한군은 두 달도 안되서 낙동강까지 다 내려오게 됩니다. 그때 맥아더 사령관이 나타나서 인천상륙작전을 벌입니다. 


이렇게 9.28일 서울을 다시 수복하고 10월말 북한 대부분을 점령합니다. 이렇게 한반도 전체는 전쟁터가 된 것입니다. 다시 11월 마오쩌둥은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것처럼 북한이 망하면 중국이 위태롭다며 중공군 60만명이 참전을 합니다. 이로써 다시 서울까지 밀리며 흥남지역은 고립이 됩니다. 1950.12.15 ~23 흥남철수작전이 시작이 됩니다. 미군 10만명과 군수물자 35만톤을 배로 수송하려는 계획이었으나 군수물자를 모두 버리고 1만4천명의 피란민들을 태우고 떠났는데 이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것이 영화 <국제시장>입니다. 



이 배가 부산과 거제도로 들어오면서 1949년 말 부산은 47만명이 되고 1955년 100만이 됩니다. 

이렇게 한국전쟁 3년간 그 당시 인구가 2천만명인데 사망자 250만명이 생겨납니다.  무려 인구의 1/10이상을 잃은 참사였습니다. 


이렇게 모여든 피란민들은 부산의 랜드마크였던 영도다리에 모여 가족을 찾았습니다. 


기차에 매달려오는 사람들 속에 하염없이 가족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3년간 이많은 피란민들을 껴안고 살았던 부산사람들, 역사와 현대사의 자취를 남긴 도시가 부산입니다. 

기념관 전시장



이 곳에는 6025시대의 모습이 그림으로 남겨져 잇습니다. 

※ 김성환 작가
예전 고바우 염감을 그리신 만화가로 한국전쟁 당시 기자로서 현장을 그림으로 기록했다고 합니다, 이 작 품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로도 등재가 되었습니다.





  • 기념관 신경복 선생의 일기
김진애씨는 "안네 프랑크처럼 그걸 기록하는 분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참 고마웠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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