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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속의 인문학 방송에서 항구도시 부산의 역사적인 장소 영도대교, 태종대, 비석마을, 용궁사를 소개하여 글을 올려봅니다. 부산은 제가 살던 곳이라 보는 동안 고향을 방문한 느낌으로 봤는데 알지못한 내용도 많아 알찬 방송이였습니다. 부산은 조선전기와 후기를 나누는 분기점이 되는 임진왜란일 일어난 도시,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 개항한 항구도시로 역사의 굴곡마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도시입니다. 역사현장의 한 곳으로 떠나봅니다.


영도대교


이 곳은 제가 어린시절 살던 동네입니다. 남포동, 광복동 옆에 토성동에 살았는데 수없이 많이 봐왔던 곳입니다. 제가 부산을 떠날때는 한창 롯데타운을 건설중이였었는데 개인적으로는 롯데타운이 시야를 막아서 별로라고 생각했었는데.... 영도대교는 롯데타운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는 다리입니다. 부산항과 영도를 연결하고 있는 영도대교는 오래전부터 부산의 랜드마크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이 곳에는 굳세어라 금순아, 신라의 달밤을 부른 가수 현인(1919~2002년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1세대대중가수)씨의 동상이 있습니다. 출연자들은 모르는데 저는 다 아는것 보니 저도 이제 연식을 속이진 못합니다. 


굳세어라 금순아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묵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메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홀로왔다


일가친척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위에초생달만 외로이 떳다.


1950년 6월25일 새벽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으로 1950년 10월25일 한국전쟁에 본격적으로 중공군이 개입을 하면서 압록강 유역까지 도달한 연합군이 38선 이남지역까지 퇴각했는데 이를 1.4후퇴라 합니다. 이 당시 모습은 영화 국제시장에서 잘 보여줬습니다. 이 당시 흥남부두에 있던 연합군들도 철수를 준비중이였는데 수많은 피난민들도 흥남부두로 몰려들자 연합군은 배에있던 600톤의 무기와 장비들을 버리고피난민을 실었습니다. 배의 정원의 10배가 넘는 피난민을 승선하고 부산항을 거쳐 거제도에 도착을 했는데 이 전쟁속에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생겨납니다. 그들이 했던 간절한 약속이 "우리 나중에 영도다리에서 만나자." 그당시 부산을 대표하던 랜드마크였습니다. 그들의 꿈이자 최종목적지가 영도다리였던 것입니다. 


또한 이 영도다리는 우리나라 유일의 도개교(배가 지나갈때 다리가 올려져 통행할 수 있도록 만든다리)로 1934년 일제강점기때 일제의 대륙침략을 위한 보급 및 수송로 구축을 목적으로 건설이 되었습니다. 현재도 도개식을 보는 관광객이 많다고 합니다. 


비석문화마을



이 마을은 제가 들어보지 못한 곳이라 인터넷을 찾아보니 아미동 위쪽으로 이루어진 마을이였습니다. 초등학교때 친구들이 이 곳에 사는 아이들이 많았고 저도 여러번 올라가봤던 마을이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는데 이번기회에 알게 되었습니다. 비석마을은 촘촘하게 붙어있는 미로처럼 복잡하게 이어진 산턱에 모여있는 마을입니다. 이 집들의 주춧돌이나 외벽에 비석들이 있는데 이 마을이 묘지위에 세워짐을 말합니다. 


그럼 왜 묘지위에 집을 지었을까요?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패망으로 광복을 맞은 대한민국은수많은 국외동포들을 귀국을 합니다. 부산을 거쳐간 동포들이 200만명, 그 중 20만인구는 부산에 정착을 했습니다. 또 한국전쟁때도 수많은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당시 부산의 인구수용능력은 30만명이지만 90만명이 달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삶의 터전을 찾기 위해 산으로 갈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공동묘지마저도 그들이 살아야할 터전이었습니다. 이 곳 주변으로 감천벽화마을도 함께 있는데 부산의 산토리니라 불릴정도로 매력을 가진 마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개하는 부산여행지추천 장소입니다.




태종대

태종대는 깍은 듯한 기암절벽과 에메랄드빛 바다를 만날 수 있습니다. 신라 29대왕 태종 무열왕이 절경에 심취해 활쏘기를 즐겼다고 하여 유래된 이름이라고 합니다. 제가 어린시절에는 아빠차를 타고 산책하듯 자주 들렀는데 지금은 관광버스같은 전용버스를 타고 올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전엔 생활지같은 곳이였다면 지금은 관광지 같은 느낌입니다. 



이 곳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곳이 등대인데요 이것은 1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침략과 전쟁이 계속되며 물자수송의 필요성을 느낀 일본이 건설한 것입니다. 100년간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우리에게 침략의 역사를 일깨워 주는 등대입니다. 



또한 이 곳에서는 바다를 보며 먹을 수 있는 해산물 좌판이 있습니다. 이 곳에 앉으면 신선이 노닐었다는 신선대바위, 오륙도와 대마도까지 볼수 있습니다. 오륙도는 보는 방향에 따라 봉우리가 5개로 보이기도 6개로 보이기도 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 대마도와 동래부사 송상현 그리고 민조의 항쟁

대마도는 부산에서 1시간30이면 도착하는 50km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대마도의 관광객의 90%가 한국관광객이라 하는데 그만큼 관광객 의존도가 높은 곳으로 척박한 땅입니다. 그래서 옛부터 우리나라를 침략해 노략을 일삼았는데 1592년 4월 18천명의 병력과 700척의 배를 이끌고 부산을 공격해옵니다. 이당시 부산을 지킨 군사는 고작 1000명, 왜군은 하루만에 부산진성과 동래읍성을 함락합니다. 이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1551~1592)이 있었는데 왜군이 살려줄테니 길을 내어달라고 요구하자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1760년에 제작된 동래부 순절도에는 아녀자들도 지붕위에 올라가 기왓장을 던지며 항쟁한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현재 동래읍성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부산의 동래구에는 2005년 수안역 지하철공사도중 수많은 인골과 무기들이 발견이 되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의 숨은 영웅들이였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없이 잔인하게 베인 상처가 있고, 5살 어린아이의 유골, 무참한 학살의 현장이 된 곳입니다. 이렇게 민초들의 뜨거운 항쟁이 살아 있는 곳이었습니다.



용궁사



부산을 대표하는 해돋이 명소는 용궁사로 소원을 빌면 이루어 진다고 합니다. 솔직히 바다와 녹음이 함께하는 용궁사는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관광객이 많아서 조금은 상업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너무 아름다운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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