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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잡 2 어쩌다 순서를 뒤죽박죽 보게 되었는데 오늘 역시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 얘기 또 들어보세요. 옛날 한양과 오늘의 서울이 공존하는 곳  종로와 중구입니다. 종로와 중구는 서울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옛 한양도성의 사대문 안쪽에 위치하고 있어 옛 한양이라고 보면 됩니다. 옛 조선을 거쳐 근대, 대한제국, 현대에 이르는 역사적인 여행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원조함흥냉면

오늘의 먹거리는 냉면입니다. 6.25전쟁 직후 종로일대에 함경도 실향민들이 자리를 잡은 후 그들이 모여 살던 곳에 고향의 음식들이 남아있어 종로구 근처 냉면집이 곳곳에 있다고 합니다. 함흥냉면과 평양냉면의 차이는 면입니다. 평양냉면은 메밀로 면을 만들고 항흥냉면은 감자전분으로 만드는데 원래는 메밀로 만든 것만 냉면이라고 불렀지만 1930년대 기계식 국수틀이 보급되면서 쫀쫀한 전분 반죽도 쉽게 국수를 내릴 수 있게 되면서 감자전분으로 만든 면이 생겨나게 된것입니다. 또 1920년대 일본이 개마고원에 대규모 감자밭을 조성한 후 감자 집산지였던 함흥에서 많은 전분으로 국수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대중화가 된것은 1920~30년 전분국수가 대중화가 되면서 이 후 함흥냉면으로 불리게 됩니다. 북한에서는 이를 농마국수라고 부릅니다. 평양냉면은 메밀로 만드는데 메밀은 겨울이 제철이라 사실 평양냉면은 겨울철이 제철입니다.


한양과 정도전 그리고 서울




고려를 폐하고 조선을 세울 때 경복궁을 중심으로 종묘와 사직을 배치하고 국가 이데올리기를 적립하는 등 조선과 한양의 설계자는 정도전입니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의 기틀을 세우는 과정에서 백성과 관료중심의 이념을 강조를 했습니다. 이성계의 아들이 7명이 있었는데 개국당시 왕자들은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고려말기까지 원나라의 지배를 받아 수도의 방비가 중요했던 정도전은 외부의 침략에 대비하자는 명분으로 왕자들의 사병을 관군으로 만들어 북방을 지키게 하자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이에 이방원과 대립을 하다 이방원의 칼에 맞아 숨을 거둡니다. 


한양은 지금과 서울과는 다릅니다. 한양은 경복궁 좌우로 인왕산과 낙산을 따라 높이 8.5M 둘레 18KM의 성벽을 세웠습니다. 남쪽으로 남산과 그 아래 남대문까지 포함하여 

1913년에는 일본군 주둔지역과 공업지역을 포함하여 확대가 되어가는 일제강점기의 경성이 되었고, 1930년에는지금의 서울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인구도 해방될 때는 100만이 되었고, 60년대에 이르러서 400만, 70년대 800만, 산업화에 맞물려 서울 집중은 계속 가속화되었고, 드디어 80년대 1000만명 시대가 됩니다.,그렇게 인구천만의 거대도시로 태어나게 됩니다. 인구증가의 가장 큰 힘은 '보일러의 힘'이라고 합니다.50~60년대 기름보일러와 아파트가 등장하게 되면서 공중에 땅이 생긴 것과 같은 효과가 생기고 부동산을 소유하게 되면서 중산층이 형성이 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더 몰려 밀도가 높아지면서 생활상까지 변하게 됩니다.


한양의 북대문 숙정문

북대문인 속정문은 현재는 북악산 고갯마루에 위치해 있습니다.  1968년 1.21 김신조 사건을 계기로 청와대 경비를 위해 출입이 막혔으나 2007년 개방이 되었다 보수공사로 다시 닫혔으나 최근 다시 재개방이 되어 숙정문 안쪽 성벽을 따라 등산을 할 수 있습니다. 이 곳이 한양도성의 북족끝으로 정도전도 이 곳에서 한양도성의 계획을 그려보았을 것입니다. 이 막혔던 길은 조선왕조 500년과 최근 100년 총 600년을 다니지 않던 길입니다. 이 길에 오르면 감회가 새로울 듯합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은 서울에 사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살고 있는 1000만의 사람들은 대부분 돈벌로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서울은 이주민들의 도시입니다. 경희궁에 위치한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서울의 변천사를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서울을 만든 많은 사람들의 역사를 담고 있는 곳입니다. '영자의 전성시대'라는 영화를 보면 철공소노동자, 때밀이, 버스안내양 등 시골에서 올라와 고단한 서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단편을 보여주는데 고종보다 영자가 문화적 맥락이 서울과 더 깊다라고 합니다. 그들이 머물 던 곳은 청계천변, 한남동, 아현동 등 비좁은 무허가 판자촌뿐이였기에 주거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아파트가 들어서게 됩니다. 결국 도시는 주거와 교통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사는 곳과 일하는 곳을 엮어주는 대중교통이 생겨나면서 지금의 생활방식이 나타나게 된겁니다.


세운상가




청계천 변에 지어진 세운상가는 1968년에 지어졌는데 그당시는 최초의 럭셔리 주상복합 공간이었습니다. 그 당시 연예인,고위공직자 등이 입주해 살았고 상가는 국내유일 종합가전제품판매로 호황을 누렸습니다.70년대까지 서울의 명물이었는데 강남이 개발되면서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용산전자상가가 세워지면서 그 명성을 잃게 됩니다. 현재는 2017년 9월 새단장을 하고 청년창업공간이 들어섰습니다. 오랜시간 기술을 추척해온 장인들과 4차산업혁명을 이끌어갈 아이디어가 자랄 수 있는 곳으로 세대가 함께 공존하며 새로운 창작과 개발이 이루어 지고 있는 곳입니다. 대표적인 공간으로 FAB LAB 이라고 불리는 제작실험실이 있는데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 수 있는 공간입니다.이 곳에서는 일반인 누구나 수업기초를 배우고 기계를 만질 수 있습니다.



종묘와 사직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나라의 가장 큰 제사를 지내던 곳이 종묘와 사직입니다. 종묘는 충,효의 정신으로 왕실의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고 사직은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입니다. 유시민씨는 왕실에서 이렇게 제례를 하면서 유교사상을 백성들에게 전파하는 역할을 하는데 현재의 종묘는 원래기능을 상실을 했다고 보고 어느 사회든 그 사회를 묶어 세우는 도덕적 기초는 필요하기에 공동체에게 일체감을 주는 이념이 필요한데 현대의 종묘의 역할을 하는 곳이 어디인가? 라는 얘기를 꺼내십니다. 왕의 나라였던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을 거쳐 일제강점기를 거치는데 일본의 통치를 벗어나려는 과정에서 민주공화국이 선포가 됩니다. 지금부터는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주권재민을 시대정신으로 채택이 되어지고 이 시대정신을 되새기게 만들고 그 공간을 볼때마다 사람들이 주권재민을 떠울리게 하는 공간이 있다면 그것이 21세기의 종묘라는 얘기를 하시는데 정말 감탄이 나왔습니다. 광화문광장,탑골공원,명동성당,성공회 같은 장소 외 유시민씨에게 종묘란 5번가로 불리는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였습니다. 현재 영화로도 나온 1987, 이 해 여름 남영동 509호 조사실에서 물고문, 전기고문 등 경찰의 가혹 행위에 의해 서울대생 박종철 열사가 사망을 하는데 그 일로 6월 대정부 시위를 벌이던 이한열 열사의 사망으로 더 불타오르게 하면서 거리로 시민들이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경찰과 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명동성당을 비롯한 종교단체로 사람들이 몰려들게 됩니다. 그렇게 시민들의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종교기관은 국제적인 조직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정부가 함부로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민주공화국을 제대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호해준 장소입니다.  즉 삼한시대 소도와 같은 장소입니다. 소도는 제사를 지내던 지역으로 죄수가 도망와도 돌려보내거나 잡아 갈수 없었던 곳입니다. 1987년 6월10일 오후 6시 6월민주항쟁의 시작을 알렸던 성공회 성당 타종소리와 함께 전국의 모든 도시에서 동시에 국민대회를 엽니다. 교회는 타종을 차량은 경적을 울렸고 그 소리는 시민들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그렇게 시민들의 참여로 6월항쟁이 시작됩니다. 6월민주항쟁의 최후의 보류였던 명동성당에서는 그 아래 개성여고학생들이 도시락에 편지를 넣어서 수녀님들을 통해 전해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6월 민주항쟁이 민주주의를 세운 결정적 계기가 됬다고 인정을 한다면 언제와도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공간 중에서 건축적으로 좀 뚜렷이 구분되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그런 공간들을 잊지않고 그 공간에 갔을때 다시 한번 그런 생각을 해보는 것 이 것이 21세기의 대한민국의 종묘가 아닐까 생각한다!!! 라는 말씀에 박수가 절로 나옵니다. 이에 현준씨는 근대에는 두가지 축이 있는데 민주화와 산업화입니다. 이어 사직단의 21세기 버전을 말씀하시는데 한국사회의 사직단은 돈을 숭배하기에 아파트로 보았고 유시민씨는 코엑스,롯데타워 같은 돈과 물질에 대한 욕망이 투사되는 공간 마천루라고 말합니다.


문학의 밤

교익씨는 사직단 애기를 하다 먹는 것에 대한 제사를 포함한다며 서울에서 서민들이 많이 먹던 빈대떡을 이야기합니다. 푸른 콩의 빈대로 녹두전으 의미하는 것이고 빈대떡과 관련한 그 당시 자료를 찾다 김종삼시인의 시를 발견을 하는데 이진성 헌법재판소장이 청문회에서 인용해 화재가 된 시라고 합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이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사람들이 이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아닌 시인이라고


"누가 제게 정의가 뭐냐고 물어도 

저는 진정한 법륙가가 되지 못하므로 

잘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인과 다름없이 살아가시는 

인정많은 우리국민들이

헌법이라는 우산아래

기본적 인권을 보장받으면서

비합리적인 차별을 받지 않으실 수 있도록

헌법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에서 

이 시를 말씀드립니다."    -이진성

이에 유시민씨도 인사청문회에서 마지막으로 하고싶었던 말을 시로 대신 한 시를 읽어주십니다.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길>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 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것이다


한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이어서 유희열씨도 가사를 읊습니다.

언제부턴가 말이야

먹고살아가는 문제 

돈을 번 친구들,아이들얘기 우리 참 달라졌구나


언제부턴가 말이야

농담에 숨어서 삼켜 버린 맘

술에 취해 서성대는 밥

그런 내가 익숙해져


우린 행복해진 걸까

맘껏 소리 내 웃던 기억이 언젠지 난 모르겠어

그렇게 우린 변해가고

시간은 멋대로 흐르고


정말 고맙고 또 미안해요

우리 아프지만 마요 


종로 피맛골



시민씨가 동선씨에게 외국도시와 비교했을 때 서울에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문화의 다양성이란 답을 합니다.  도심재개발로 피맛골 같은 것이 사라지는데 이런것이 다양성이 줄어드는 것이 아닌가라는 이야기로 피맛골이 등장합니다. 피맛골은 조선시대에 중인이나 상인들의 삶의 공간이 된 곳이였는데 말을 탄 양반을 피하는 길이다 라는 의미에서 피맛길이란 이름이 붙게되엇습니다. 종로대로를 따라 쭉 이어진 좁은 길인 이 피맛길은 재개발로 인해서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아있습니다. 건축적으로 하늘이 보이냐 안보이냐의 차이로 인해지금의 피맛길은 엣정취를 느낄 수 없는 곳이 되립니다.그러면서 현준씨는 우리가 보존해야 할 것은 건물이 아니라 골목길의 모양이라고 합니다. 건물은 어차피 낡으면 다시 만들어야 하는 곳이고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의 모양이 더 중요했기에 이 피맛길도 골목길의 모양을 보존하는게 더 의미가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개발이익을 위해 피맛길은 골목을 유지하며 저층으로 개발을 하고 대신 인근지역의 규제를 풀어주어 윈윈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데 이 말에 동감합니다. 

북촌,서촌,익선동 같은 곳들은 서울의 다양성을 높이는 마을인데 특히 익선동은 좁고 꼬불꼬불한 길들이 앞에 무엇이 았는지 예측이 되지 않기에 더 큰 매력이 되고 도파민도 많이 생겨나는 즐거움을 준다고 합니다. 옛 도시는 필지가 적기에 소규모 자본으로 사업을 사작하기 좋고 다양성이 생기는데 현재 발달된 강남은 금융업발달로 대출도 쉬워서 필지를 크게 나누다 보니 이런 소규모 자본의 다양성을 느끼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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