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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종교사에서 가장 상징적 도시이자 

성서의 역사가 살아숨쉬는 

예루살렘과 주변도시들

거친 아라비아 사막 한가운데에서

 문명의 꽃을 피우고 사라진 도시

 요르단의 페트라로 떠나봅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성서의 역사가 살아숨쉬는 4000년 역사의 고도입니다. 

  • 유대교의 뿌리인 성전산

  • 기독교인들에겐 예수부활의 현장이 된 곳 

  • 이슬람교도들에겐 마호메트의 성지

즉,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로 예루살렘은 성스러운 도시입니다. 


예루살렘은 히브리어로 '평화의 도시'지만 이스라엘은 단 한 차례도 평화로울수 없었던 비운의 역사를 안고 있습니다. 3개 종교의 성지가 공존하는 이 곳을 차지하려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건물양식은 물론 자신들의 전통풍습과 생활양식을 고수하며 각자 살아가고 있습니다.


  • 예루살렘 구시가지 성문 중 북쪽에 위치한 다마스쿠스문으로 통과하면 무슬림시장이 있습니다. 남북으로 뻗은 로마도시의 도로인 카르도 주변으로 원주들과 상점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 기원전 1000년 다윗왕(이스라엘 2대왕)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아 그 위에 건설한 수많은 유적들은 이제 기록으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다윗왕에서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태평성대를 누립니다. 다윗왕은 최초의 통일국가를 완성하고 유대교를 확립했는데 현재 유대인들은 다윗왕의 가묘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율법을 삶의 신조로 살아가는 유대인의 가장 큰 소망은 감람산묘지에 묻히는 것입니다. 이 곳에는 답살롬 기념비가 있는데 다윗의 3쨰 아들로 왕권을 노리고 배신을 하다 전사 했는데 죽은 후 용서를 받아 이 곳에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 예루살렘은 오래전부터 외침을 받아 히스기야터널을 3000년전에 만들었습니다. 전쟁시 성 밖 기혼샘을 이용할 수 없을 경우를 대비해 만든 것입니다. 기혼샘에서 터널 안 실로암못까지는 512m 암반을 뚫어 만들었는데 아시리아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진격해오는 다급한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물 길을 내는 또 다른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이 곳에는 터널을 팔 때 사용했던 청동 도끼와 등잔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기원전 701년 단단한 바위를 파서 터널을 만든다는 것은 신기에 가까운 일입니다. 1880년 발견된 실로암비문에는 양쪽터널이 뚫렸을때 동료들이 도끼를 부딪히며 좋아했고 터널로 물이 흘러나왔다라고 쓰여있습니다. 현재 비문은 이스탄불 박물관에 소장이 되어 있고 그 모형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 예루살렘성전의 서쪽벽은 통곡의 벽으로 유대교신앙의 성전이자 예루살렘의 대표적 유적입니다. 서기 70년 로마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승리한 뒤 유대인들을 몰아냅니다.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위해 무너지지않은 성벽 일부를 남겨두었는데 그 일부가 오늘날 굳건히 남아 유대인의 신성한 순례지가 된 것입니다.



  • 통곡의 벽 옆으로는 성전성과 시가지를 잇던 윌슨육교가 있습니다. 육교안으로 들어가면 고대의 성전벽이 이어집니다. 이 또한 성스러운 장소로 여기며 통곡의 벽 순례를 마친 외국에서 온 유대교 순례자들은 예루살렘 탈환의 기쁨을 떠올린다.
  • 통곡의 벽 남쪽은 서기 70년 로마와의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으로 성전을 파괴한 로마인들이 거대한 돌들을 떨어뜨려 도로가 함몰되기도 하고 솔로몬성전의 원주기둥 잔해도 파괴된 채 남아있습니다. 성전성의 오펠언덕에 주거유적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고대 예루살렘의 생활상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바로 고대 예루살렘의 번영과 영광을 상징했던 다윗과 솔로몬시대의 흔적입니다. 
  • 예수가 죽고 사흘만에 부활한 이 곳은 전 세계 기독교인들의 성지가 되어 순례자가 몰려옵니다. 성 분묘 교회는 예수가 죽은 골고다 언덕에 335년 건축되었는데 기독교 최고의 성지입니다. 614년 페르시아 군대가 들어와 한 차례 파괴되었지만 1149년 십자군에 의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세계각국의 순례자들은 예수를 눕혔던 장미 빛 4각 석회암 등 이 교회 각 성소를 둘러보며 예수의 마지막 발자취를 따라갑니다. 
  • 예수 무덤 교회는 예수가 안치 되었던 동굴에 세운 교회로 염을 치른 예수는 동굴로 모셔졌고 죽은지 3일만에 부활합니다. 지하는 특별한 성소로 콘스탄티니우스황제의 어머니 헬레나여사가 이 장소에서 예수의 십자가를 발견합니다. 순례자들이 벽에 새겨 놓은 십자가들도 볼 수있습니다.
  • 안식일이 끝나는 토요일밤이 되면 샤마이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이 땅에 처음 뿌리를 내린 유대인들의 성지에서 이제는 이슬람교도들의 성지로 바뀌었습니다. 솔로몬 왕의 신전 터에 7세기 말 건립된 이슬람사원인 황금사원은 청색계통 타일에 아라베스크문양을 넣었습니다. 마호메드가 메카에서 죽은 후 밤새 말을 타고 달려와 성전성에 바위를 딛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해서 지어진 바위 위의 돔사원입니다. 그래서 이슬람교의 3대 성지는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입니다. 


1967년 이스라엘 민족은 예루살렘을 되찾지만 분쟁은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있습니다.




쿰란과 마사다

이스라엘과 요르단 국경을 맞닺아 있는 곳에 쿰란과 마사다가 위치해 있습니다.


  • 마사다는 예루살렘동쪽에 있는 유대광야를 1시간 남짓 달리면 요단강에서 흘러들어 만들어진 소금호수인 사해가 있습니다. 쿰란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서의 사본인 사해사본이 발견된 성스러운 곳입니다. 오랜기간 동굴에 잠들어 있던 굴 안 항아리에서 양피지에 성경을 적은 사해사본은을 1947년 이곳의 한 양치기소년이 우연히 동굴을 발견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서기68년 로마군의 침략을 피하면서 급하게 이 동굴에 숨겨놓은 것이였습니다.

  •  광야에서 집단생활을 하던 유대교 에세네 파가 공동체를 거주했던 곳으로 유대인들의 뛰어난 수로시설 덕분에 이 삭막한 곳에 살 수 있었습니다. 발굴을 통해 많은 물 저장고를 발견하였는데 산에서 내린 빗물은 긴 수로를 통해 물저장고로 모이게 됩니다.

  • 사해를 따라 남쪽으로 향하면 유대광야 동쪽에 우뚝 솟은 바위 절벽 요새인 마사다요새가 나옵니다. 434m 우뚝 솟은 바위 절벽에 위치한 요새로 유대인이 최후의 항쟁을 펼쳤던 장소입니다. 주거지에는 많은 방과 창고가 남아있습니다. 술저장고, 돌을 달궈 이용했던 로마식 목욕탕 흔적은 증기탕까지 구비하고 있습니다. 공동생활의 흔적인 빨래터에는 크고 작은 물통과 칸막이들이 있고 화려한 모자이크와 벽화의 일부도 남아있습니다. 비둘기는 식량이여서 비둘기 집을 만들어 키우기도 했습니다. 75만리터의 물을 저장가능한 물저장소도 있습니다. 유대인 최후의 항쟁지이며 저항정신이 살아숨쉬는 곳입니다.

  • 마사다요새 북쪽 끝에는 헤롯왕의 궁전이 있는데 헤롯왕(BC73~BC4)은 로마 제국이 유대 민족을 지배하기 위해 내세운 유대의 왕입니다. 궁전이 이 곳에 있는 이유는 유대인의 위협과 폭동에 대비한 피난처였는데 오히려 유대인들의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유대광야와 사해가 한눈에 들어오는 풍광좋은 곳에 왕궁은 위치해있습니다. 마사다에서 3년간 결사항쟁하던 969명의 사람들은 서기73년 로마군이 마사다를 정복했을때 이 곳 유대교회당에 모여 자결합니다. 마사다를 포위한 로마군은 밑에다 진을 치고 3년간 대치하며 공격합니다.높은 위치의 마사다를 공격하는 것은 쉽지않았습니다. 로마인들은 포로로 잡은 유대인들을 시켜 오랜시간 경사탑을 쌓아 총공격을 합니다. 결사항쟁한지 3년만에 마사다는 정복당하고 이스라엘은 멸망합니다.




아크레(아코)


북서쪽 지중해를 끼고 있는 항구도시로 역사적으로 여러 민족이 이 땅을 점령하며 남긴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는 곳이자 마지막 십자군도시입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중요한 관문이자 200년 동안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아크레는 3차 십자군전쟁의 승자 살라딘에 의해 이슬람제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됩니다. 많은 정복자들이 거쳐갔던 만큼 로마, 비잔틴, 이슬람 등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오랜 전쟁으로 파괴된 성채와 건물들이 도시의 잔해에 묻혀힜지만 일부에선 복원작업이 한창입니다.


  • 칼 엘 움단은 18세기 건축된 당시 상인들이 머물렀던 숙소입니다. 아크레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로 각국에서 모인 수많은 상인들이 이 곳을 거쳐갔습니다. 아크레는 지리상의 이점으로 중간무역 거점지로 발전을 해 나갑니다. 
  • 바다로 들어오는 적들로 부터 보호하기 위한 거대한 방벽이 도시전체 바닷가를 감싸고 있고 육지쪽도 방벽을 쌓아 거대한 요새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습니다. 
  • 고대 페니키아항구로 발전했던 아크레는 635년 이슬람제국에 점령되었고 1104년엔 십자군이 탈환합니다. 이 후도 이 도시를 차지하려 공방전이 계속되었는데 3차 십자군전쟁시 아크레 공방전이라 불리는 역사적 전투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 전투에서 살라딘이 승리했고 1291년 최종적으로 아크레와 예루살렘은 이슬람제국에 넘어갑니다. 수많은 전쟁의 격전지 였던 십자군성채 항상 탈출구가 필요했습니다. 성채에서 항구로 연결되는 작은터널과 도심지에서 연결되는 대형터널은 침략자들에게 탈출하기 위한 곳입니다. 
  • 제자르 모스크는 십자군에 대적한 살라딘이 이 도시를 점령하고 1781년 처음으로 세운 회교사원으로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혼합된 '오스만 건축양식'의 건물입니다. 이슬람은 십자군이 지은 도시 위에  자신들의 건축물을 세웠는데 이 모스크는 어디서도 볼수 없는 독특한 양식입니다. 
  • 모스크 옆 아크레 이슬람시장은 현재 아랍인 거주지역입니다. 살라딘에게 빼앗긴 이 땅을 기독교세력은 700년만에 다시 찾았지만 이제 누가 주인이라 말할 수 없을만큼 다양한 민족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가이사리아

아크레 남쪽 항구도시인 이 곳은 로마지배 당시 헤롯왕이 바다를 매립해 건설한 항구도시입니다. 

(지중해 3대 항구 : 알렉산드리아, 안타키아, 가이시리아)

  • 드넓은 모래사장 옆으로 전차경기장이 있습니다. 

  • 야외 원형 극장은 서기6년부터 500여년동안 로마총독이 상주했던 인공도시로 바다를 보며 공연을 즐기는 특별한 공연장으로 현재도 애용되고 있습니다. 

  • 해안가를 지나며 끝도없이 뻣은 로마수도교는 11이터나 떨어진 갈멜산으로부터 도심까지 이어지며 물을 공급하던 수로입니다.


암만


요르단의 수도는 암만으로 가장 오래 된 도시 중 하나로 7개의 언덕에 도시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 6000명을 수용할수있는 로마원형극장은 2세기에 지어졌는데 가장 완벽하게 남아있는 로마 건축물 지금도 각종 행사가 열리고 있습니다. 


페트라


암만에서 남쪽으로 차를 달리면 엄준한 산악지대 안에 고대 나바테아인의 고대수도 페트라가 있습니다.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란 뜻입니다. 

페트라를 건설한 나바테아인은 기원전 7세기에서 2세기가량 아라비아반도와 시리아에서 활동한 아랍계 유목민입니다. 사막의 대상로를 지배함으로서 아랍계 유목민이었더 나바테아인은 번영을 합니다. 1812년 스위스 탐험가 부르크하르트는 페트라를 발견해 유럽에 알려지는데 그 전에는 입으로만 전해오는 전설 속 도시였습니다.

  • 페트라의 입구는 물의 침식작용으로 이루어진 좁고 비밀스런 통로를 시크가 시작됩니다. 시크는 입구에서 페트라까지 높이 100M의 협곡 길로 1.5KM나 이어지고 있습니다. 

  • 가는 길에는 나바테아 인이 1세기에 절벽 및 바위를 깍아만든 수로가 있습니다. 주변 오아시스로 부터 얻어진 물은 이 수로를 통해 도시 전체로 보내집니다.  

  • 협곡안으로 30분쯤 들어가면 붉은색 암벽으로 이루어진 건축물이 나타나는데 페트라에서 가장 유명한 알카즈네입니다. bc 1세기에 건축 된 높이 43m의 왕의 장례사원입니다. 기원전 4세기 페트라는 알렉산더대왕에 의해 그리스 세력권 안에 있었기때문에 그 영향을 받았습니다. 바위 절벽을 깍아 만들었고 그리스 헬리니즘 시대의 코린트 양식입니다. 외부에는 반달족이 보물(알카즈네가 보물창고라는 뜻의 아랍어) 을 훔치기 위해 낸 구멍이 보이고  실내는 장식없는 높은 건물의 방 3개가 전부입니다. 왕의 가족 무덤은 2003년 발굴이 되었는데 나바테아의 왕인 아레타스4세의 가족묘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  어둡고 긴 협곡 끝 알카즈네 우측으로 페트라 유적이 펼쳐집니다. 페트라는 바위산이 둘러싸고 있는데 우측은 바위를 깍아만든 무덤군으로 왕가의 무덤입니다. 발굴된 800여개의 유적 중 대부분이 신전과 무덤들입니다. 때문에 '죽은자의 도시'라 불립니다. 서민의 가족무덤도 보이는데 귀족에 비해 소박한 구조입니다. 

  • 반 원형극장(1세기)은 33층계단에 6000명 수용할 수있는 거대한 규모입니다. 바위산을 비스듬히 깍고 하나하나 조각하듯 만들었습니다. 극장 안 대리석과 화강암은 이집트에서 운반한 것이라 합니다. 

  • 로마 열주대로 따라 상점과 시장이 들어서고 대로 옆으로는 궁전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 페트라 궁전은 551년의 대지진으로 파괴되었는데 기둥은 지진에 쉽게 무너져내린 둥근 조각 기둥이였습니다. 건물을 지었던 큼직한 석재들은 암벽을 깍아 무덤을 만들때 그 자리에서 나온 돌들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 절벽길을 따라 한 시간정도 걸어 올라가면 꼭대기쯤 놀라운 건축물이 나타납니다. 앗데리르(수도원) 폭 50m 높이 45m의 수도원 겸 장례사원으로  둥근문양은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비잔틴시대 수도원으로 재사용 했을거라 추측라고 있습니다. 

    페트라보다 더 가까운 페미라를 무역의 중심지로 이용하게 되면서 페트라는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 리틀페트라는 대상행렬이 휴식을 취하던 곳으로 카라반들은 휴식을 취하고 페트라에서 교역을 합니다. 4개의 식당이 있는데 바위를 파서 만든 물저장고와 식탁들이 있습니다.동서남북을 잇는 당시의 교역로가 모두 페트라를 통과하는 요지였습니다. 과거 2000년전 페트라가 무역중심지로서 얼마나 번창했는지를 보여주는 곳이 있습니다. 

페트라는 교역로가 바뀌고 7세기 이슬람의 지배와 551년 대지진으로 파괴된 채 방치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집니다.



제벨하룬산




이른 아침 페트라에서 가장 높고 신성한 곳이라는 제벨하룬산으로 갑니다. 해발 1593m의 정상에 오릅니다. 정상에는 작은 이슬람사원이 있습니다.

실내에 무덤이 있는데 아론의 무덤이라 주장합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와 히브리인들은 가나안땅으로 들어가기전 이 곳 페트라를 경유하는데 이 곳에서 아론(기독교의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형)이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집니다. 세계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고대도시, 페트라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무대이기도 합니다.



베두인

나바테아인들이 사라진 이 곳에 자리를 잡은건 사막의 또 다른 유목민족인 '베두인' 입니다. 이들은 사막에 텐트를 치고 이곳 저곳 옮겨다니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산을 내려오면서 바위무덤을 볼 수있는데 무덤 안은 시원해서 그들이 살기 적당한 곳으로 대를 이어 이 곳에 살았다고 합니다. 국가에서는 유적을 보호하기 위해 강제로 베두인들을 이주시켰는데 이주마을에는 현재 6500명정도의 베두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국토의 80%가 사막인 요르단에서 이들은  섭씨 40도의 더위와 모래바람을 이기며 낙타와 염소를 키우며 살고있습니다. 베두인들은 호전적이고 배타적인것으로 알려져왔는데 그들은 손님에게 그들의 마지막 식량도 내어주는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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